15 Apr

  당나라에 발견한 거대한 비석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시작으로 중국의 선교 역사 탐구가 시작되었다. '아는만큼보이는중국'은 도서, '대륙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중국 선교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시안, 베이징, 광저우, 원저우, 상하이, 난징, 전장, 쑤저우, 항저우, 닝보, 허페이, 타이완, 선양, 런던 총 14 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이 장에서는 시안, 광저우, 난징, 전장, 선양의 선교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안, 당나라 불야성에서 일어난 대륙의 십자가


800년 만에 깨어난 중국 그리스도의 비밀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서안부는 당의 수도였을 때부터 아주 인파가 넘치는 곳이었으나 당이 소멸하며 쇠락할  수밖에 없었고 황폐해져 가기 시작했다. 그 혼란기에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라는 그리스도교의 거대한 비석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뜻 깊은 역사적 발견이 생겨났다.

  경교비 발견 소식은 중국 학자들과 중국의 선교사들에게 빠르게 전달되었다. 아울러 시안 근교에서 활동하던 많은 서양 선교사가 비문을 탁본해 본국으로 보내면서 로마 교황청과 외국 학자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이후 각국은 이를 번역하고 연구하며 중국 경교의 관심이 증폭되었다.

  영국의 존 스티븐슨 선교사는 경교비를 답사한 뒤 경교비의 대영박물관 유치를 건의하는 한편 청 정부에 관리대책을 촉구했다. 청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백 냥을 보내지만 정작 현장에 도착한 돈은 다섯 냥에 불과했다. 아쉬운대로 경교비는 처마 밑에 설 수 있었지만 비바람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보물사냥꾼' 프리츠 홀름이 경교비를 노리다

  얼마 뒤 덴마크인 프리츠 홀름이 경교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해군 장교로 활동하고 군 생활을 마친 후 상하이에서 영국 신문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탐험가 기질이 다분했던 그는 런던으로 가서 자료들을 검토 후 ‘보물사냥'이라고 불릴 위험한 계획을 세운다. 바로 경교비를 확보하거나 복제품이라도 확보하겠다는 계획이었고 이 계획을 여러 나라의 연구기관에 제안하고 비용을 마련한 뒤 계획 실행에 나섰다. 

  시안에 도착한 그는 수많은 여정 끝에 경교비와 대면하게 되는데 그는 그것을 소중하게 보존하려 하지 않고 발로 밟고 한껏 멋을 부린 채 사진을 찍었다. 그 후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홀름은 밀반출 계획을 접고 복제품 제작으로 계획을 돌린다. 용의주도하게 진행되던 계획은 통역관 팡셴창에 의해 어긋나게 되는데, 팡셴창은 홀름과 관계가 멀어지자 복제품 제작 사실을 형이자 골동품 수집가인 팡야오위에게 알린다. 팡야오위가 사안의 심각함을 깨닫고 이 사실을 고고학의 대가인 뤄전위에게 전한다.

  그 사이 홀름은 정저우에서 복제품이 완성되었다는 전보를 받고 더 정확한 보완작업을 지시했으나 경교비에 관한 소식을 접한 차오홍쉰의 대처로 복제품 불상사를 사전에 차단하여 복제 작업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그 후 노천에 방치되던 경교비는 금승사의 폐허에서 출발해 비림에 최종 안치되었다.

   어찌됐건 완성된 복제품은 뉴욕의 부호이자 가톨릭 신자인 조지 릴리 부인이 사들여 바티칸 교황청에 기증했고, 바티칸 교황청 박물관에 안치된다. 홀름은 비석 전달을 명목으로 바티칸을 찾았다. 그 덕에 일확천금의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바티칸과 유럽에서 큰 찬사를 얻고 탐험가와 고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학파, 이단으로 몰리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안에서 신성과 이성의 연합을 주장하는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주장하는 안티오케이아학파 사이의 논쟁에 참여해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신모설을 부인했다. 

  그러나 431년에 에페수스(에베소)에서 열린 3차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로스는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어머니'라고 선언했고 네스토리우스는 이에 반대하다가 정죄되어 이단으로 내몰렸다. 이후 그는 이집트에서 유배 생활 중에 사망하였고 그의 추종 세력은 동로마제국의 영역을 피해 중동 지역인 시리아를 거쳐 이란과 이라크 등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지방에 정착했다.


경교, 당의 국가 공인 종교가 되다

  경교는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의 중국 명칭으로서 대진경교라고도 한다. 콘스탄티노플 (오늘날의 이스탄불)의 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에서 시작된 종교이다.

  페르시아는 중국과 무역 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특히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인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중국 내 선교의 발판은 이소그드인들이 중국을 오가며 네스토리우스파 마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시리아 동방교회 소속의 시리아인 올로푼이 장안에 당도해 복음을 전하며 마침내 중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황제와 만나 정식으로 그리스도교를 중국에 전한 최초의 인물인 올로푼은 페르시아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주교가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와 예수의 복음을 중국에 전하기 위한 위대한 발걸음은 올로푼 일행의 여행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사명을 감당하고자 산을 넘고 사막과 강을 건너 장안에 이르렀다. 중국인 현장은 구도를 위해 인도로 향했지만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은 전도를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현장은 불교 경전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인도로 들어갔고 귀국 후에는 불교 경전의 번역에 매진했다.

  당나라에 대륙이 통일되면서 개방정책이 펼쳐졌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당 태종은 재상인 방현령을 서쪽 교외까지 보내 올로푼 일행을 영접할 정도로 외국 선교사에 대한 호의를 보였다. 올로푼은 성경을 전달하며 선교 의사를 전했고, 태종은 올로푼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좋게 여겨 중국 선교를 허락했다. 서양 그리스도교 문명과 중국 문명의 역사적 만남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638년 7월, 경교는 태종에 의해 국가 공인 종교가 되었다. 페르시아와 당의 친분관계 덕분에 경전 번역과 의료 활동 등을 활발히 펼치고 주요 도시마다 교회를 세우며 선교에 주력할 수 있었다. 전국 각지에 경교 사당이 건립되었고 올로푼은 중국 경교의 총주교로 임명되었다. 이와 더불어 많은 선교사가 당 정부의 관리로 활동했다. 경교비의 문자기록에 따르면 '대진경교유행중국비'는 이스가 경비를 대고 아들인 애덤이 원문을 작성한 뒤 여수암이 제작을 맡은 비석이다. 이스와 애덤을 보고 당시 당나라 경교 선교사들은 당나라 현지에서 가정을 꾸렸음을 유추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애덤은 '중국 교부, 주교 겸 사제'로 중국인으로 자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당의 통치자가 이국의 종교에 대해 개방과 포용의 정책을 펼친 결과 다양한 종교가 당나라에 수용될 수 있었다.


동서양 종교의 만남

  당대는 위진남북조 때 전래된 불교의 영향이 확대되는 시기였다. 이 불교가 기존의 유교 및 도교와 접목되며 유불도 삼합과 원융의 단계로 진전하게 된다. 중국은 한대에 모든 학설을 물리치고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확정했다. 그런데 후한 이후 위진 남북조의 혼란기를 거치며 도교가 흥성하고 불교가 전해지며 괄목할 정도로 성행했다. 당 고조는 개국 이후 이런 풍조를 위험으로 간주하고 불교와 도교의 사원을 폐쇄하고 승려와 도사들을 환속 시켰다. 이렇게 고조가 종교를 탄압했는데 중국에서 경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 태종이 경교를 적극 후원한 덕분이었다. 한편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의 가족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지도자의 취향과 의지에 따라 종교정책은 변화가 많았고 경교도 종교정책에 따른 외계 종교의 흥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중국은 서방에서 온 경교를 대진교로 칭했다. 때로는 페르시아교로 혼용하기도 했다. 반면에 항저우 출신 세례교인인 이지조는 ‘삼위일체의 성부는 곧 삼위일체이다'라고 설명한 후 경교가 그리스도교라는 것을 확신했다.


교회당은 황폐해 터만 덩그러니 남다

  중국에서 경교는 포교를 시작한 이후 약 50년 동안 번성했으나 이후 급격히 약화되었다. 특히 무종이 ‘회창의 폐불’이라 불리는 불교 탄압정책을 펴면서 경교도 큰 타격을 입었다. 무종은 외래 종교의 교세를 조사하도록 명했다. 그 뒤 경교를 비롯한 외래 종교 금지 조서를 반포하여 성직자 20만 명을 납세자인 양세호로 편입시켰다. 아울러 각 사원을 폐쇄하고 각종 종교물을 파괴했다. 그 결과 비문은 건립된지 64년 만에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

  종교 탄압 1년 만에 무종은 33세의 나이로 죽고 선종이 즉위해 숭불 정책으로 불교를 복원했으나 경교는 쇠락을 면할 수 없었다. 879년 황소의 난이 한창일 때는 경교 선교사 등 외래 종교인들이 10만 명 이상 살해되었다. 결국 많은 경교 신자가 신앙을 포기하거나 비밀로 했고 선교사들도 다수가 추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경교는 중국 서부와 북부, 변경과 연안지역에 흩어져 송대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중국에 전파된 그리스도교는 고구려, 발해, 신라, 일본에도 전해졌다고 한다. 일부 몽골족도 송시대에 경교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스도교를 접하고 신자가 되었다. 원나라 개국시 경교도 왕족과 함께 재부흥했다. 그러나 원이 멸망하면서 100년이 안 된 명 초에 완전히 소멸했다.

  경교는 초기에 중국에서 안착하는가 싶었지만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발달해온 기존 종교 체제와 민간신앙 그리고 한계가 있는 경교의 선교 방식 때문에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교는 동서양 문명의 첫 만남을 성사시켰고 양자에게 사고의 틀을 확장시켰다.



광저우, 청나라 개항과 중국의 사도행전


중국 선교의 또 다른 출발점, 취안저우와 광저우

  당시대에 중국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있었고 명과 청 시대까지 지속되었지만 뿌리가 깊지는 못했다. 당대에는 실크로드, 원대는 취안저우, 명과 청 시대에는 마카오와 광저우를 통해 복음이 전해졌다. 취안저우는 원대에 유일하게 중국 남해에서 무역 뿐만 아니라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런 취안저우항에 국내외의 수많은 상인이 모여들었고, 원 정부의 개방정책 덕분에 각 종교의 예배당이 건립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원이 몰락하고 명이 들어오면서 그리스도교인들은 잠적할 수밖에 없었다. 청은 아편의 수입과 유통을 금지해 영국과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패배하여 불평등조약들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서구 열강의 적대적 침탈과 함께 다시금 그리스도교가 중국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여러 선행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악행이 확대되어 오해와 억측이 난무했고,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주류를 이루었다.


바위 문을 연 사나이, 로버트 모리슨

  로버트 모리슨(1782~1834)은 서양인 최초로 중국 대륙에 파견된 개신교 선교사이며 근대 동서양 문화 교류에서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그는 <중영사전>을 비롯해 중국학과 관련된 여러 책을 출판하여 서양에 소개했으며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운영하는 등 중국에 머무는 27년 동안 많은 업적들을 남겼다. 모리슨은 중국인 가톨릭 신자 두 명에게 몰래 중국어를 배우고 마카오에서 메리 모튼과 결혼했다. 그는 잠시 동인도회사에서 통역원으로 일을 했는데, 이는 동인도회사의 정보를 선교에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일을 하면서 중국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런던선교회에서도 그의 고충을 이해하고 윌리엄 밀른 목사를 파견하여 모리슨을 돕게 하였다. 모리슨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신구약 성경의 중국어 번역이 있다. 그는 중국판 십계명인 <성유16조>에  착안해서 성경을 번역했다. 번역에 힘을 쓴 결과 <사도행전>은 1000권이 넘게 인쇄되었고 <신약성서>도 중문으로 번역되었다. 1819년 모리슨은 밀른과 드디어 성경 전체의 중문 번역 작업을 마쳤다. 현대영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화형당한 윌리엄 틴들과 같이 모리슨 역시 깊은 사명감으로 성경의 중문 번역에 매진했다. 그 무렵 1819년 밀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다. 모리슨의 아내는 2년 뒤 콜레라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고, 밀른은 모리슨의 아내가 떠난지 1년뒤 폐결핵으로 떠난다. 모리슨은 아내와 밀른 부부를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딛고 성경 중문 번역본을 출판했고 중국 선교를 결산하며 지속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작성한다. 1834년 병으로 쓰러진 모리슨은 52세의 나이로 광저우에서 숨을 거둔다.1836년에 모리슨을 기념하기 위해 모리슨교육협회가 성립되었고, 1839년에는 새뮤얼 브라운이 미국에서 마카오로 건너와 모리슨학교를 개설했다. 지금도 마카오에는 모리슨의 묘비와 기념교회가 있으며, 홍콩에는 모리슨기념관이 있다.


근대 중국의 으뜸 사도, 귀츨라프

  귀츨라프는 중국과 아시아의 선두주자로서 로버트 모리슨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선교사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 교육을 받아 15세 때 해외 선교를 결심했고 19세기 초중반에 자바에 있는 중국인들에게서 중국어를 배우며 중국 선교의 꿈을 키웠다. 그는 중국 선교에 대한 갈등으로 네덜란드선교회를 탈퇴하여 독립 후 마리아 뉴엘과 결혼했다. 그러나 아내 마리아가 쌍둥이 딸을 출산 중에 신생아와 함께 세상을 떠나 귀츨라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저버릴 수 없었으며 중국 선교를 성령에 의한 결정으로 받아들이고 선교여행에 나섰다. 그는 6개월동안 친구의 정크선을 타고 1차 선교여행을 감행했다. 이에 이어 2, 3차 선교여행은 마카오를 기점으로 이루어졌다. 2차 선교여행 당시 귀츨라프가 타고 있던 애머스트호는 조선 황해도에 정박했는데 그 때 귀츨라프는 조선인에게 소책자를 건냈다. 이로써 그는 조선에 발을 디딘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귀츨라프는 다양한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사역에 헌신했고 여러 선교사와 함께 언어별 사전과 문법책 저술에 힘을 쏟았다. 그는 모리슨이 번역한 중문본 성경으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였고, 마카오에 거주하면서 번역과 저술 활동을 병행했다. 뿐만 아니라 서양 역사와 지리, 과학과 문물을 소개하는 중국어 잡지를 발행했고, 존 모리슨과 함께 로버트 모리슨의 성경번역본<신천성서>를 보완하여 귀츨라프 역본 <신유조서>와 <구유조서>를 발간했다. 귀츨라프는 홍콩에서 활동하면서 ‘중국 선교는 중국인 스스로 감당해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중국 최초의 내지선교회인 복한회를 조직하였다. 복한회에서는 중국인들을 고용해 내지 깊숙이 들어가 복음전단지와 소책자들을 배포함으로써 중국인 주도의 선교를 지향했다. 그러나 그가 유럽에 가 있는 동안 복한회를 담당했던 바젤선교회 선교사들로부터 복한회 운영에 대한 지적과 비난이 이어져 이 문제로 괴로워하던 귀츨라프는 48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오래지 않아 복한회는 해체 되었다. 중국 반환 전 홍콩 정부는 그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홍콩섬 센트럴의 한 거리를 ‘귀츨라프 거리’로 명명했다.


중국 사도 바울, 쑹상제

  차이가오와 량파, 량진더 등 중국인 1세대 개신교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복음의 씨앗이 중국 전역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쑹상제는 쑹쉐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쑹상제는 13세부터 아버지와 함께 전도를 하며 ‘작은 목사’라고 불렸고, 학습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미국 선교사와 여러 후원자들에게 후원을 받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학업을 더 이을 수도, 다른 직업을 얻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모든 유혹을 떨쳐내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신학원에 들어갔다. 다만 그는 예수님의 희생과 섭리에 대한 감사로 웃고 우는 등 돌발적인 행동으로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 193일 동안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일을 겪기도 하였다. 쑹상제는 정신병원에서 성경을 40번 통독하며 자신의 삶을 복음 전파에 바치기로 마음 먹었다. 자신의 박사학위기와 상장들을 버리면서 사도 바울처럼 세상의 명예를 모두 버리고 오로지 복음 전도자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비치기도 했다.

  이후 쑹상제는 15년 동안 선교에 매진했다. 그는 생전에 매일 몇 시간씩 성경만 읽고 기도하였으며 밤에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적었다. 이러한 노력들 때문인지 그의 심한 푸젠 사투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연에 주목했다. 또한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언제나 수천 명의 기도제목이 담긴 여행 가방 두 개를 들고 다니며 중보기도를 했다. 그는 선교의 활동 영역을 점차 넓혀가며 중국인 선교사의 본보기가 되었다.


광저우의 어린 양, 린셴가오

  린셴가오는 1924년에 마카오의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나 1936년에 홍콩에서 침혜를 받았다. 린셴가오의 이름 뜻은 ‘어린 양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양이다. 그는 5세 때 호흡기전염병으로 위태로웠던 시기를 기도로 극복했다. 12세 때 세례를 받고 이후 성경학원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는 1945년에 선교를 시작했다. 1955년 숙청운동이 벌어진 시기에 삼자애국운동에 가입하지 않은채 집회를 연 린셴가오는 두 차례에 걸쳐 체포되어 20여 년 동안 석방과 감찰기간을 거쳤다. 출소 후 그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다마잔교회를 열어 예배를 재개했는데 신자가 수천명이 넘었다. 그 후 약 160차례에 걸쳐 5000여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린셴가오는 자신의 종교행위가 국가법에 위배되지 않는 정당한 행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정부와 싸웠고 어떤 환경 속에도 복음 전파와 공의 구현에 헌신하였다.

  린셴가오는 중국 미등록교회의 리더로서 큰 영향을 행사했다. 그는 2013년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나 광저우 인허위안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현재 다마잔교회는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나 얼마나 더 생존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상태다.



난징, 태평천국운동과 현대 중국의 태동


그리스도교를 잘못 받아들인 홍수전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꿈은 중국 전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꿈을 잘못 해석하여 ‘그리스도교적 이상세계의 구현'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을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홍수전이다. 광둥성 출신으로 꿈과 환상 속에서 우연히 접한 성경내용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한 홍수전은 자신을 섬기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냈다. 홍수전은 그리스도교인과 여성과 한족의 지지를 끌어내고자 노력했다. 홍수전의 계획대로 각지의 부호와 청년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들었다. 홍수전은 백성들의 불만을 토대로 1851년에 군대를 일으켜 태평천국을 건립했다. 홍수전의 군대는 여러 지역의 반군과 정부군을 빠르게 흡수해 세력을 키워갔다. 태평천국군은 100만 명의 지지자를 기반으로 1853년 난징을 함락시킨 뒤 청군 3만여 명을 몰살했다. 홍수전은 난징을 ‘천경'으로 명명하고 태평천국을 선포했다. 성경 속의 천국을 지상에 건설한 것이다. 청 정부는 홍수전을 반역자로 규정했다. 청 정부는 영국, 프랑스와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베이징 조약을 체결한 뒤 태평천국 군대를 상대하게 되었다. 청정부군의 분전으로 태평천국 군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고 내분까지 겹쳐 세력이 급속히 와해되었다. 결국 홍수전은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모두가 평등한 지상낙원의 건설을 꿈꾸었던 태평천국은 15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태평천국은 15년 동안 2000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허무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한 홍수전에게는 죄에 대한 인식도 없었으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도 없었다.


과거의 중국을 뒤엎고 현대의 중국을 마련한 그리스도교인, 쑨원

  쑨원은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을 건국한 사람이다. 유년시절 그의 가정은 고구마로 끼니를 때워야 할 정도로 어려웠다. 그는 하와이에 가서 일하던 큰형을 통해 하와이의 소식을 듣고, 서양 학문을 흠모하고 세상에 대한 궁리를 시작했다. 쑨원은 1879년에 호놀룰루 이올라니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영국 성공회 스타일리 주교가 건립한 8년제 기숙학교였다. 시골에서 자란 그는 영어를 못했지만 빠르게 적응해갔다. 그는 서양식 교육으로 그리스도교와 서구역사, 수학과 과학, 체육과 군사 등 다방면의 지식을 빠르게 습득했다. 시골 소년이 세계적 안목을 지닌 인물로 재탄생되는 과정이었다. 쑨원은 학교를 졸업하고도 계속 공부하기를 원해 호놀룰루 오아후학교에 진학했다. 쑨원이 신앙과 학업,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선교사와 선생님들이 그에게 입교를 권했고 그는 이를 형에게도 알렸다. 그러나 유교적 생활 방식을 고집한 쑨메이는 동생을 귀국시켰다.

  1883년 귀국한 쑨원에게 중국은 자신이 생활했던 하와이와 너무나 달랐다. 그는 지역사회를 개량해보고자 도로 건설, 가로등 설치, 야경단 조직 등을 건의했다. 그중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민간신앙을 저지하려 촌민들에게 충고를 했지만 반감만 키울 뿐이었다. 하루는 쑨원의 친구 루하오둥이 사원에 들어가 신상을 파괴하는 사건이 있었다. 주민들은 쑨원을 의심했고 1883년 쑨원은 홍콩으로 피신했다. 홍콩에서 헤이거 목사를 만난 쑨원은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쑨원은 교회 2층에서 거주하며 공부와 봉사를 병행했다. 쑨원은 홍콩에 머무는 동안 신앙과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혁명정신을 고양하였고 그리스도교인인 혁명 동지들을 늘려나갔다.

  쑨원은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에 따라 진로를 의학으로 선택했다. 그는 의학 공부를 하고 의사 면허를 얻어 마카오에서 약국을 개업했다. 이후 혁명에 전념하면서 1895년 광저우 총양봉기를 주도했지만 실패하여 호놀룰루로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중화민국 ‘청천백일기’를 디자인한 루하오둥은 교수형에 처해지며 중국 혁명 과정에서 사망한 최초의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총양봉기 이후 쑨원은 일본 망명과 런던 구금사태를 거치면서 국내외의 혁명 세력을 규합해 신해혁명을 이끌었고 이후 중화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쑨원은 노년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많은 그리스도교인 덕분에 혁명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임종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시종일관 그리스도교인이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장인, 장모, 아내, 처제, 처남, 친척 모두 그리스도교인이었습니다. 가족예배를 드렸고, 훌륭한 목사님이 계시면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누가 나를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고 말하겠습니까?”


현대 중국 교회의 기틀을 다진 딩광쉰

  현대 중국 그리스도교의 존립과 발전의 역사에서 딩광쉰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15년 상하이의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딩광쉰은 어려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자연스러운 신앙 환경 속에서 자란 딩광쉰은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환경에서도 평생 신앙의 길을 버리지 않았고, 중국 그리스도교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상하이 성요한 대학 부설 중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고 졸업한 후에는 성요한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아들이 뛰어난 엔지니어가 되어 편안한 삶을 살기를 바란 아버지에 반해 전공을 문과로 전향하여 영어와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6년에 걸쳐 성요한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문학사와 신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성공회 목사가 되었다. 상하이 그리스도교 청년회 학생부 간사 등 그는 다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예수님의 섬김 정신에 기초하여 사회와 민중에 대한 봉사를 열심히 했다. 그는 종파에 상관없이 미래의 중국 교회 지도자 양성에 앞장섰고 1955년 성공회 주교에 임명되었다. 그는 노년에도 비영리단체 참여 등 사회주의 중국에서 신앙과 국가를 모두 고려하는 활동들을 펼쳤다.



 전장, 쉔더탕의 기적과 푸른 눈의 애국자들


중국을 품은 사람, 허드슨 테일러

  허드슨 테일러의 부모는 약제사였으며 테일러를 임신한 상태에서 그를 훗날 중국 선교의 일꾼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테일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전도를 했다. 자라면서 부모와 친구들로부터 해외 선교 소식을 접했고 중국 선교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며 어렸을 때부터 중국 선교의 꿈을 키웠다. 테일러는 선교를 위해 의학에 전념하였는데 해부 실습을 잘못하여 성홍열에 걸렸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였지만 테일러는 죽음 보다 중국에 갈 수 없게 될까봐 걱정하였다. 테일러는 런던의 중국선교회에 가입하였고 파송을 명받고 중국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상하이에 도착하였고 윌리엄 파커의사 부부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3년동안 18차례를 걸쳐 의료선교에 힘을 썼다. 영적 스승인 윌리엄 번스 목사를 만나 선교와 영성에 대해 큰 가르침을 받은 테일러는 중국인들에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중국옷을 입고 회색인 머리카락을 염색하여 놀라운 선교효과를 얻었다. 테일러는 상하이를 떠나 닝보에 도착해 중국선교회 존 존스와 함께 거주하며 신앙의 동역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오래지 않아 중국선교회와 약간의 견해차이가 생겼고 테일러는 중국선교회를 탈퇴하고 닝보선교회를 설립하였다. 의사인 윌리엄 파커가 아내를 잃어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테일러는 닝보의 병원을 맡게 되었다. 테일러는 몰려드는 많은 환자들로 부담이 되었고 병원의 재정상태도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누군가의 후원금으로 병원을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과로로 기관지염을 앓았고 과중한 사역으로 망가져 갔다.


중국내지선교회의 탄생

  테일러는 치료를 받기 위해 상하이로 갔다. 왕라이쥔 형제는 그와 동행하면서 간호를 하고 런던으로 돌아와 테일러와 같이 성경을 번역하였다. 테일러는 런던에 도착한 즉시 닝보어로 된 신약성경과 찬송가, 복음전단지 인쇄에 착수했다. 테일러의 부부는 매달 복음도 모른 채 죽어가는 중국인들을 떠올릴 때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중국내지선교회를 창설하였고 선교 후원금 모금과 선교지원자에 대한 교육과 상담을 맡았다. 중국은 당시 영국과 관계가 좋지 않았고, 모두 가기를 꺼려 하는 곳이었지만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 된 테일러는 선교사 16명을 데리고 중국으로 향했다. 이후 선교 활동에서 큰 두각을 나타낸 테일러 일행은 중국까지 타고 갔던 차운반선 램머무어호의 이름을 따 ‘램머무어 파티’라고 불리게 되었다. 테일러는 선교여행을 다니며 길거리 노숙을 하는 등 여러 고난과 역경에 맞닥뜨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모든 과정을 비전에 대한 확신으로 이겨냈다.

  1868년 중국 내륙에서 선교사역에 열중하던 테일러에게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졌다. 프랑스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아원의 아이들 수십 명이 사망하자 각종 유언비어가 돌면서 내지선교회 선교사들에게도 안 좋은 영향이 미쳤다. 양저우의 한 지배층 인사가 허드슨과 동역자들을 해치려고 하기까지 했다. 이 과정 속에서 여러 선교사들이 다쳤지만 그들은 여전히 양저우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다. 그런데 뒤에서 테일러에게 더 큰 고난이 닥쳤다. 중국에서 두 아들과 두 딸과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테일러는 눈물로 아내와 아이들을 모두 정장에 묻고 1871년 영국에서 부모의 동의를 얻어 같은 내지선교회 소속 제니 폴딩과 재혼을 한다.

  램머무어팀을 비롯해 남녀 선교사 22명으로 시작된 중국내지선교회는 1866년부터 테일러가 세상을 떠난 1905년까지 39년에 걸쳐 이어졌다. 39년 동안의 시간 동안 테일러가 각국에서 중국 선교를 위한 강연회를 열어 많은 선교사가 중국 내지 선교에 동참했다. 그러나 1950년 중국의 정치 상황과 동서냉전의 여파로 중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내지선교회의 성공 요인

  “나에게 만일 1000만 파운드가 있다면 중국에 전액 헌납할 것이고, 나에게 만일 목숨이 1000개 있다면 하나도 남김없이 중국에 바치겠다.”

  중국내지선교회가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테일러라 활동했던 40여 년간 중국 정세가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선교사들의 내지 출입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는 외국인에게도 선교의 자유가 있었다. 테일러는 20년 동안 중국내지선교회를 훌륭하게 이끌었고, 경험이 많은 선교사 열 명을 뽑아 운영을 맡겨 조직 확대와 발전에 중대한 밑거름을 다졌다.

  테일러가 스위스에서 요양을 할 때 둘째 부인 제니가 암으로 사망하자 그곳에서 장례를 지냈다. 그리고 다시 중국 창사로 돌아와 중국을 가슴에 안고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전장 양쯔강변의 뉴피포 서양인선교사묘지에 묻혔다. 장례식 날, 상하이와 런던에서는 테일러를 기리는 대규모 추도회가 열렸다. 문화대혁명 당시 많은 선교사 묘비와 묘석이 파괴되었지만 테일러 부부의 묘비는 땅속에 묻혀져 있어 파괴되지 않았다. 테일러 부부의 묘비는 2014년에 쉔더탕 교회에 안치되었으며 그의 사역은 16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자손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의 헌신과 희생이 없이는 죽어가는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할 수 없다.



선양, 최초의 한국어성경과 만주 벌판의 봄바람


  중국 둥베이는 변방에 불과했지만 중원 인구가 증가하면서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산둥과 산시, 허베이와 허난 등지에서 생계 터전을 잃고 유랑하던 난민들이 중원을 벗어나 동북 지방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주민들 중복음을 접한 신앙인들도 많이 생겨났다. 중국 둥베이의 그리스도교는 잉커우에서 출발했다. 잉커우는 지금도 중국 동북지방 무역과 교통의 허브로서 큰 역할을 감당한다. 엠마누엘 장 프란시스 베롤 신부가 잉커우에 도착해 둥베이 각지를 순시했고 목회자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신자들을 위로하고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개신교는 1852년 이후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의 선교사가 잉커우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했다. 독일인 선교사가 지은 푸인탕은 잉커우 최초의 교회이자 중국 동북지방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 또한 알렉산더 윌리엄슨 부부가 잉커우에서 선교를 시작하며 장로교회의 첫 장을 열었다. 이를 시작으로 장로교는 중국 둥베이3성으로 선교중심을 이루었다.

  스코틀랜드 선교사 두걸드 크리스티는 1895년 3월 청일전쟁의 여파가 잉커우까지 미치자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중국 최초의 적십자 병원을 설립했다. 곧 일본군이 잉커우를 점령하자 적십자병원은 군인과 일반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이렇게 세워진 7개 적십자병원에서 1000여 명의 부상자를 치료해 부상 이후의 각종 감염과 패혈증을 예방할 수 있었다. 1911년에는 중국 동북과 내몽골 일부 지역에 페스트가 기승을 부렸다. 청 정부의 의학고문을 맡은 두걸드 선교사는 각 기차역에 검역소를 설치해 페스트의 확산을 막았고 격리수용실과 실험실, 방역실을 설치해 치료와 퇴치에 힘썼다. 이런 노력과 희생 덕분에 페스트는 진압되었고 중국과 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창춘에는 아일랜드인 토머스 풀턴 목사가 처음 교회를 세웠다. 그 뒤 영국인 존 길레스피 목사가 합류했다. 1896년에는 교회 부설 베풂의원, 1907년에는 교회학교인 추이원 학교가 세워졌다. 그런데 길레스피 목사가 세번째로 창춘을 방문해 선교를 하던 중 도적들에게 피살된다. 창춘의 교인들은 1933년에 길레스피 목사의 헌신을 기념하기 위해 기금을 모아 학도관을 건립한다.


위대한 수염과 사과나무를 심은 자

  중국 선교는 확대되어 북동부로 확산되었다. 옌타이에도 복음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옌타이에 첫발을 디딘 개신교 선교사는 알렉산더 윌리엄슨이다. 그와 그의 가족은 중국 선교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알렉산더와 이사벨 부부는 옌타이에 도착하자마자 영국식 교회당과 저택을 짓고 선교와 개간에 힘썼으며 병원과 학교를 지어 교육선교에도 힘썼다. 이후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문화 선교에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중국 최초의 식물학 책인 <식물학기초>를 번역하였으며 서양의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는 <격물탐원>을 펴냈다. 아울러 익지서회와 광학회를 조직했는데 익지서회는 후에 중화교육회로 발전하여 그리스도교 전파에 힘썼다. 아내인 이사벨도 가난한 여자아이들을 위해 여학교를 세워 정성으로 보살폈다. 그들의 외동딸인 마거릿 윌리엄슨은 중국에서 작가로 활동하며 많은 유명인과 교류했다.

  한국 선교에 큰 영향을 준 네비우스는 닝보에서 중국 선교사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불교 사찰인 관음당에 교회를 열고 선교활동을 벌였으며 아내 헬렌과 함께 산둥성 최초의 여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배운 과수재배기술을 중국에 전수하여 사과 품종을 개량했다. 그는 개량한 종자를 현지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고 재배 기술을 전수했다. 이 사과가 크게 성공하자 옌타이 일대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옌타이사과 산지가 되었고 지금도 옌타이사과는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이다. 그래서 네비우스는 ‘옌타이사과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는다. 당시 한국에서는 젊은 선교사들이 복음 전파를 위해 한글 성경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더욱 효과적인 선교를 고민하다가 네비우스 박사를 초청하기로 했다. 한국 청년들의 초청을 받은 네비우스는 한국에 머물며 선교전략을 제시했다. 전략의 핵심은 자립, 자치, 자전의 삼자교회였다. 현지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고 교회를 현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비우스 선교전략을 받아들인 한국의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들을 빠르게 안착시키고 성장시켰다.


존 로스와 한국어 성경

  존 로스 목사는 신혼의 30세 청년 때 스코틀랜드장로회 연합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당시 만주로 불리던 중국 동북부 지역 선교사로 중국에 들어왔다. 그는 중국어를 배우는 한편으로 선교를 하며 아편에 찌든 상인들과 관리들을 치료해주었다. 아울러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여 왕징밍과 린완이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입교시켰다. 그는 샤오베이관에 세를 얻어 교회당을 세우고 최초의 현대식 교육기관인 펑톈원후이서원을 설립했다. 그는 1883년에서 1884년 사이에 성징베풂의원의 창립자인 두걸스 크리스티 등과 함께 청 지방 정부를 도와 전염병 치료에 앞장서서 무료로 약을 나눠주고 빈민들을 구제했는데 이때 많은 이가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었다. 성징베풂의원은 의화단 운동 당시 병원이 불에 타 무너졌다. 그 후로 재건축을 시작했으나 러일전쟁으로 중단되었고 1907년 비로소 완공되었다. 성징베풂의원을 토대로 동북지방 최초 의과대학인 펑톈의과대학이 설립되기도 했다. 지금은 성징의원으로 선양을 대표하는 병원들 중 하나이다.

  로스는 선양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 선교에 주력하는 한편 성경의 조선어 번역과 조선 선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조선에서 온 무역상 이응찬을 만났고 신약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로 결심하여 이응찬에게 조선어를 배웠다. 그렇게 1879년에는 학습한 내용을 토대로 <조선어 첫걸음>을 출간했다. 이는 영어로 기록된 최초의 한국사 책이었으며 이 책을 계기로 한글 띄어쓰기와 가로쓰기가 처음 시도되었다. 로스는 1879년에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와 사도행전 번역 초고를 들고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후 한국어성경을 신쇄할 인쇄기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렇게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와 친구들의 재정지원을 받아 한국인 이응찬, 김진기, 서상륜, 백홍준 등과 함께 성경의 한글 번역을 시작했다. 1882년 교회에 펑티엔 조선어인쇄소가 건립되고 이곳에서 세례 문답과 전도용문서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 최초 한글 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서> 3000부와 <예수셩교 요한복음>, <4복음서> 등이 인쇄되었다. 이렇게 인쇄된 한글성경은 백홍준과 서상륜 등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전달되었고 한반도 남쪽으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들로 의주를 중심으로 세례를 자원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났다. 이러한 성경 전달 사건은 복음이 전달되기 전에 자국어 성경을 가진 예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종교사에서 매우 독특한 사례로 소개된다.


조선족 그리스도인

  백홍준은 존 로스를 도와 최초의 한글성경을 탄생시킨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언더우드 목사가 개설한 신학반에서 공부한 뒤 개신교 전도사가 되어 각지에서 신자들을 모아 집회를 했다. 그러던 중 1892년에 의주에서 ‘나쁜 책을 간행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어 옥사한다. 그렇게 백홍준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인들 중 기근과 폭정, 정치적 박해에 시달리다가 만주 땅에 정착하는 인구가 서서히 늘어났다.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민족 박해가 더해지며 중국 둥베이3성으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크게 증가했다. 그리고 이들이 지금의 중국 조선족을 형성하게 된다. 조선족에 대한 그리스도교 선교는 크게 동서 양쪽에서 전개되었다. 동쪽은 지린성 옌볜 지역을 중심으로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일대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20세기 초에 캐나다 선교사이자 의사인 로버트 그리어슨과 한국인 김진근, 한경희 등이 조선에서 올라와 옌지 일대 조선족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그래서 1917년까지 두만강을 건너와 헤이룽장성 무단장, 무렁, 지시미산, 하얼빈 등지의 조선족에게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서쪽은 지린성 퉁화를 중심으로 랴오닝성에 거주하던 조선족에 대한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다. 존 로스 목사 등이 퉁화와 린장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고 이후 평톈 등지로 확대되었다. 이처럼 외국 선교사들의 선교 이전에 이미 만주에서 세례교인이 생겨났고 한반도에서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읽은 그리스도교인이 생겨나 세례를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이는 당시 한국인들이 주체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전파한 결과 ‘성경 중심적’ 교회의 역사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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